고삐 풀린 공포

1999년 7월 20일 밤 시작된 은밀하고도 대대적인 작전

자기 집 침대에서 잠자던 사람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공안 경찰에 끌려갔고 수감시설이나 감옥에 내던져졌습니다. 그렇게 외부와 고립된 장벽 안에서 구타와 고문으로 죽어갔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시 중국공산당 최고 지도자 장쩌민 총서기의 명령으로 시작했습니다. 당시 중국 전역에서 유행하며 1억 명 가까이 수련하고 있던 파룬궁의 규모와 인기는 장쩌민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가장 강한 권력자가 누구인지 보여주려 했습니다.

이틀 뒤인 7월 22일, 중국 정부는 “사회적 안정을 해친다”는 이유로 파룬궁 금지령을 발표했습니다. 20년이 지난 현재까지 중국에서 지속되고 있는 탄압 정책의 신호탄이었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수천만 명의 수련자가 단번에 ‘불온한 정치 세력’으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3개월 안에 말살하라” 장쩌민의 탄압 명령

박해 초기, 수천 명의 수련자가 일종의 ‘본보기용’으로 체포됐습니다. 그 결과 중앙 정부, 경찰 간부, 군 고위층도 수련자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파룬궁은 당시 공장 근로자에서 중산층 직장인, 대학 교수 같은 지식인에서 정치국 간부의 가족까지 모든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얻고 있던 겁니다.

무신론자이자 공산주의자, 전체주의 권력자인 장쩌민은 공포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파룬궁의 인기, 급속한 성장, 엄청난 규모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중국 전통문화와 정신적 가치를 따르는 삶이 되살아나는 것도 위협적으로 여겨졌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중국공산당이 파괴해 온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명예를 훼손하고, 경제를 파탄 내고, 물리적으로 소멸하라!” – 장쩌민

당시 공산당 최고 지도부인 중앙정치국의 다른 위원들은 파룬궁을 탄압하자는 장쩌민의 주장을 잘 납득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장쩌민은 독단적으로 파룬궁을 ‘당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하고 3개월 이내에 완전히 말살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한 권력자의 빗나간 시기심이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나치 게슈타포 같은 비밀 경찰조직 ‘610 판공실’

파룬궁 탄압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조직이 ‘610 판공실(사무실)’입니다. 탄압을 전담하는 공안 조직입니다.

‘610’이라는 명칭은 설립 날짜인 1999년 6월 10일에서 비롯됐습니다. 파룬궁에 대한 탄압이 공식화되기 약 40일 전입니다. 장쩌민이 고위 간부만 불러 개최한 회의에서 직접 설립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610 판공실은 설립 근거와 권한, 책임이 법률로 규정되지 않은 비밀경찰입니다.

이 조직은 한동안 그 설립 사실과 활동 목적이 일반 중국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았고, 공산당 간부와 정부 관리들 사이에서만 알려졌습니다. 설립을 알린 통지문에는 “즉시 군대를 구성하라”, “투쟁 전략을 수립하라”, “(파룬궁) 말살 작업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는 지시가 담겼다고 합니다.

해당 통지문은 중국 전역 관료 체계 말단까지 촘촘히 배포됐고 모든 간부에게는 610 판공실과 산하 조직에 “반드시 협력하라”는 지시도 떨어졌습니다. 공산당원만으로 구성된 중국의 사법부와 판사들 역시 명령에 따를 의무가 있었다는 점에서 610 판공실은 “법 위에 군림하는 조직”으로 평가됩니다.

610 판공실은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습니다. 경찰, 정보요원 등 중국의 방대한 공안 기구가 610 판공실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민간기업도 대기업에서부터 지방의 작은 사업장까지 조직망이 설치됐습니다. 조직원에게는 파룬궁 탄압을 위해서라면 기업 전체에 어떤 명령이든 내릴 권한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장쩌민은 610 판공실에 사실상 무제한의 권한을 쥐여주며 파룬궁 탄압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이 조직이 무자비한 고문으로 악명을 날리게 된 이유입니다.

자택 무단 침입과 약탈, 납치…돌변한 경찰

1999년 7월, 중국 공산당이 파룬궁 박해를 공식적으로 선언하면서 문화대혁명 시기를 떠올리게 하는 공포 분위기가 중국 전역을 뒤덮었습니다.

강도가 아닌 경찰이, 일반 시민의 자택을 무단으로 급습하고 현금과 금품을 이런저런 명목으로 압수하며 사실상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파룬궁 서적이나 자료를 폐기하고 수련자들을 강제 연행해 투옥했습니다.

거리 구석구석을 달리는 트럭에 설치된 확성기에서는 파룬궁을 비난하는 방송이 울려 펴졌습니다.

1999년 7월 22일 • 경찰이 거리에서 파룬궁 수련자들을 체포하고 있다.

홍콩 매체에 따르면 진압 작전 첫 주에만 5만 명이 구금됐고, 초기 몇 주 동안 체포된 수련자들은 상당수가 경기장에 갇혔습니다. 구금자가 너무 많다 보니 중국의 거대한 수용소와 감옥으로도 다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국적인 파룬궁 서적 소각으로 재현된 문화대혁명의 악몽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명령에 따라, 전국의 지방 당국은 파룬궁 서적과 기타 홍보 자료를 없애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습니다. 당국은 서점, 비디오 대여점, 복사업체, 인쇄소를 수색했으며 파룬궁과 관련된 물품을 소지하거나 배포하는 사람을 처벌했습니다.

단 3개월 만에 중국 당국은 전국에서 수천만 권의 파룬궁 서적과 강연 녹음, 영상물이 압수돼 파기·소각됐습니다.

7월 28일 • 파룬궁 서적과 영상물 등 관련 자료 소각 행사가 수도 베이징을 비롯해 대도시 톈진과 장쑤, 지린, 후베이성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다음 날 상하이와 광둥, 산둥, 랴오닝, 쓰촨, 산시성으로 확산했다. — 인민일보, 1999년 7월 29일

이러한 공개 소각 행사는 중국인들에게 문화대혁명의 몸서리치는 기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각종 구실로 대량의 군중을 살상했던 중국공산당의 정치운동이 또다시 시작된 겁니다. 이는 중국인들의 트라우마이자 거부감을 일으키는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파룬궁 관련 자료를 대량으로 폐기한 것을 두고 이후 전개된 관영매체의 대대적인 흑색선전 공세에 앞서 허위와 왜곡을 밝혀낼 증거물을 미리 없앤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선전기관과 관영매체들이 파룬궁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허위 보도했을 때, 이를 반박할 자료를 제시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수련자들, 서방 언론에 ‘진실 알리기’ 기자회견

1999년 10월, 파룬궁에 대한 탄압이 3개월째 접어들면서 상황이 더 가혹해지는 가운데, 처지를 알릴 곳 없던 중국인 수련자들은 베이징에서 소수의 외신 기자를 초청해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중국 정부의 감시를 피해 은밀히 열린 이날(29일) 기자회견에는 로이터, AP통신, 뉴욕타임스 소속 외신기자 7명이 참석했습니다.

기자회견을 찍은 사진은 중국 시각으로 다음 날, 미국 시각으로는 29일 뉴욕타임스 전국판 1면에 실렸고 같은 신문 A섹션 10면에 실린 기사 본문에는 그간 중국 매체에서는 접할 수 없는 수련자들의 목소리가 담겼습니다.

한 수련자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많은 게 아니라 평화로운 수련 환경을 원할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기자회견에 참석한 수련자 가운데 2명은 이후 구금 중에 고문을 받고 사망했습니다.

목숨을 건 기자회견, 베이징의 파룬궁 수련자 30명은 당국의 삼엄한 탄압 속에서 외신 기자를 초청해 비밀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서 발언한 수련자 대부분은 행방이 두절됐고 2명은 살해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숨진 수련자 양딩(오른쪽 아래)과 밍타오차이(왼쪽 사진 왼쪽 인물).

중국 당국은 파룬궁 탄압 사건을 보도한 외신 기자들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기자들은 당국으로부터 ‘불법 보도 혐의’가 적용돼 경찰의 심문을 받고 자백서에 서명을 강요받았고 기자증과 거주 허가증이 일시적으로 압수됐습니다.

또한 중국 외교부에 불려가 경고를 받아야 했는데, 이후 중국 내 파룬궁 박해에 관한 외신 보도는 2022년까지 거의 중단됐습니다.

“우리 회원들은 추적당하고, 구금당하고, 심문을 받고, 위협을 받았다. 텔레비전 리포터들은 위성 전송이 방해를 받았고 비디오 배송이 지연됐다. 많은 회원들의 기자증과 거주 허가증이 무차별적으로 압수당했고, 일부는 더 심각한 추가 조치를 받을 것이라는 위협을 받았다.” – 중국 외신기자클럽이 중국 외교부에 보낸 항의서, 1999년 11월 10일

파룬궁 수련을 이유로 징역 18년…보여주기식 재판

1999년 12월 26일, 기자들도 연휴를 보내러 떠난 크리스마스 다음 날 중국 정부는 박해 초기, 가장 먼저 본보기로 체포된 베이징의 수련자 4명에게 각각 7년에서 18년형을 선고했습니다. 재판은 미리 짜맞춘 판결에 따라 보여주기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수련자 왕즈원(왼쪽 마이크 앞에 선 남성)은 다른 수련자 3명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이 재판은 다른 수련자들에게 수련을 포기하지 않으면 처하게 될 상황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경고였다. 사진 제공=왕즈원 가족

중국 관리들은 외신의 재판 보도를 차단했고 보도가 어렵도록 세부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서방에서는 주요 명절 중 하나이지만 중국에서는 그저 평일에 그쳤던 이날, 재판은 중국 방송을 통해 전국에 중계됐습니다. 파룬궁을 수련하면 어떤 일을 겪게 될 것인지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이 파룬궁 수련자에 대한 체포는 부당하며, 중형을 선고하는 것은 안 될 일”이라며 중국 당국을 비판했습니다.


중국 전역으로 확산된 고문과 죽음

1999년 10월 25일, 파룬궁 수련자가 경찰 구금 중 사망한 첫 사례가 보고됐습니다. 천잉이라는 이름의 17세 소녀였습니다.

그 후 몇 달간 사망 사례가 지속적으로 보고됐는데, 다수는 구금 중 가혹행위와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철저한 감시 사회에서, 구금 사실을 확인하고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해 중국 외부의 인권 활동가에게 전달하는 것은 어려움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대부분 사례는 발생하고 나서 빨라야 한두 달, 수개월 후에야 외부로 알려질 수 있었습니다.

탄압이 광범위해진 2000년대 중반부터는 공통점이 뚜렷해졌습니다. 파룬궁 수련자들은 전국의 구금 시설에 분산 수용됐고 빈번한 가혹행위와 고문에 노출돼 있었습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라”는 명령으로 인해 수련을 포기할 때까지 고문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일이 관행이 됐습니다 .

‘치명적인 운동(A Deadly Exercise)’

– 월스트리트저널, 2000년 4월 20일

“사망 하루 전, 천즈쉬는 자신을 체포한 이들에 의해 또다시 파룬따파(파룬궁의 정식 명칭)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가죽 곤봉에 여러 차례 맞아, 의식이 거의 없었던 58세의 여성(천즈쉬)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격노한 지방 관리들은 천 씨에게 눈 속에서 맨발로 달리라고 명령했다. 이틀간 고문으로 인해 그녀의 다리는 멍들어 있었고 짧게 잘린 검은 머리카락은 고름과 피로 뒤덮여 있었다. 그녀는 밖으로 기어 나와 토하고 쓰러졌다. 그녀는 다시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고 2월 21일에 사망했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월스트리트저널 중국 특파원으로 근무한 이언 존슨은 2000년 4월부터 11월까지 중국 내 파룬궁 탄압에 관한 11편의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파룬궁에 관한 잔혹한 폭력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한편 이런 탄압이 베이징(공산당 지도부)에서 직접 명령한 일이라고 밝혔습니다.

파룬궁 탄압이 지방 당국의 산발적인 인권 침해가 아니라 국가 정권 차원의 종교 탄압이라는 점을 세계 최초로 다룬 외신 기사였습니다. 존슨 특파원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퓰리처상을 수상했습니다.
(퓰리처상 링크) https://pulitzercenter.org/people/ian-johnson

존슨의 첫 기사가 나오고 약 1년 4개월 만에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에게 고문을 가하라는 분명한 지시가 내려졌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기사를 발표했습니다.

‘고문을 동원한 파룬궁 탄압'(Torture is Breaking Falun Gong)’

워싱턴포스트, 2001년 8월

“1년 반 동안 진압에 어려움을 겪던 중국 정부는 올해 처음으로 이 단체(파룬궁)에 대한 체계적인 폭력 사용을 승인하고 세뇌 교육 네트워크를 구축했으며 마을마다, 직장마다 수련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고된 작업에 착수했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한 톈안먼 광장 호소

2000년 1월, 탄압 개시 이후 관영 매체에서는 수개월째 파룬궁에 대한 비방 보도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파룬궁 수련자들은 대학에서 퇴학당하거나 직장에서 해고됐습니다. 집은 압수 수색을 받았고 약탈을 당했습니다. 직장에서든 집에서든 언제든 끌려갈 위험에 노출됐습니다.

끌려간 수련자들은 중국 법률에서 보장한 재판도 없이 노동교화형 처분을 받고 노동교화소(강제노역소)로 보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당함을 제기할 어떠한 공식적인 창구와 절차도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갈 곳이 없게 된 파룬궁 수련자들은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정부와 시민들을 향해 부당함을 호소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중국 사회에서 톈안먼 광장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지방에서 상경해 하소연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소규모의 산발적 시위가 있었지만, 점차 중국 전역에서 수련자들의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이들은 주로 파룬궁의 원칙인 진(真)·선(善)·인(忍)이 적힌 현수막을 펼쳐 드는 것으로 무고함을 호소했습니다.

최후의 수단 • 파룬궁 수련자들이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파룬궁의 원칙인 ‘진(真)·선(善)· 인(忍)’이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다. 톈안먼 광장은 중국 전역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이 상경해 호소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1999년 10월 29일, 로이터 통신은 “파룬궁 수련자들은 전례 없는(unlikely) 시위자들”이라며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에 고요히 대처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통신은 “(이날) 수십 명의 회원들이 (톈안먼) 광장에 가부좌하고 앉아 불복종 활동을 강화했다. 이들은 경찰이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고 머리채를 붙잡고 승합차로 끌고 가는 동안에도 차분하게 침묵을 지켰다”고 전했습니다.

이어 “우리를 구타한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 역시 거짓말에 속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 관한 진실을 모르고 있다”는 한 수련자의 말을 덧붙였습니다.

공안과 무장경찰, 사복경찰이 삼엄한 감시를 펼쳤지만, 광장을 찾는 수련자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당시로서는 진실을 모르는 중국 대중에게 중국공산당의 거짓말을 폭로할 거의 유일한 창구였기 때문입니다.

2000년 2월 5일, 프랑스 AFP통신은 “(전날) 중국 경찰이 톈안먼 광장에서 파룬궁 수련자들을 진압했다”며 “광장 사방에서 수련자들에게 달려들어 구타하고 질질 끌고 간 다음 승합차에 몰아넣어 쫓아냈다”고 전했습니다.

마침 설날을 맞아 광장을 찾은 많은 관광객과 중국인, 이들의 모습을 촬영하던 외신 기자들은 그대로 폭력 진압의 목격자가 됐습니다.

AFP 통신은 “경찰은 설날을 즐기는 관광객과 중국인 가족들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소리치며 주먹질과 발길질, 밀치기 등 폭력적인 체포 장면을 찍은 영상을 내놓으라고 했다”며 “외신 사진기자들에게는 즉시 광장을 떠나지 않으면 체포하겠다고 위협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폭행 현장의 목격자들 • 베이징 톈안먼 광장 한 복판에서 파룬궁 수련자가 공안에게 두들겨 맞은 채 쓰러져 있다. ‘파룬따파는 좋다’고 쓴 현수막을 펼쳐 들었다는 이유였다. 사진 왼쪽, 현장을 떠나는 경찰의 왼손에는 낚아챈 현수막이 들려 있다. 뒤쪽에서 지켜보는 행인들 사이로 접근을 막는 경찰들의 모습이 보인다.

폭압을 유지하기 위한 막대한 비용

2001년 중국 공안부 보고서에 따르면, 톈안먼 광장에서만 파룬궁 수련자를 체포하는 데 드는 비용이 하루에 250만 위안(약 4억8천만원)이었습니다. 연간 약 9억 위안(1700억원)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중국 전역의 도시에서 외딴 농촌 지역까지 경찰과 610 판공실 조직원을 포함하면 장쩌민은 최소한 연인원 수백만 명을 파룬궁 박해에 동원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비용은 연간 1천억 위안(약 20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파룬궁 대응에 들어간 재정 자원은 전쟁 비용을 넘어섰다.” – 중국 랴오닝성 법무부 관리, 마싼자 노동교화소 내부 회의에서

장쩌민은 인건비 외에도 노동교화소(강제노역소) 확충, 세뇌 센터 설치, 감시망 구축에 막대한 비용을 사용했습니다. 파룬궁 수련자 체포와 추적을 강화하려 성과급도 지급했습니다. 여러 지역에서 파룬궁 탄압 실적에 따라 건당 수천~수만 위안(수십만~수백만원)의 상금을 내걸었습니다.

맹렬한 흑색선전…중국 여론은 오히려 피로감

중국공산당은 1년 반 가까이 대대적인 탄압을 밀어붙였고 사회는 공포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여론은 탄압에 부정적이었습니다. 여론은 파룬궁에 호의적이었으며 오히려 강압적인 탄압에 거부 반응을 보였습니다.

탄압이 실패로 향하는 가운데 관영매체 보도에서는 파룬궁을 단기간에 해체하지 못한 것에 대한 공산당 지도부의 실망감이 드러났습니다. 2000년 말 성명에서 당국은 파룬궁과의 싸움에 대한 “광범위한 대중”의 이해를 촉구했습니다. 초기의 자신감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그 무렵 장쩌민과 심복들은 탄압을 진전시키기 위한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톈안먼 분신자살’ 조작극…여론은 동정에서 혐오로

2001년 1월 23일, 설날 하루 전날이었던 이날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5명이 집단 분신자살을 시도해 1명이 숨지고 4명이 심한 화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사건 발생 2시간 만에 불탄 시신 등 끔찍한 사진을 쏟아내며 분신자살을 시도한 이들이 “파룬궁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약 열흘 후인 2월 4일, 워싱턴포스트(WP)는 분신을 시도한 사람들이 살았던 지역을 방문해 이웃과 주변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했지만, 5명 중 최소한 2명은 분신 사건 전까지 파룬궁을 수련하는 모습이 한 번도 목격되지 않았다고 전했습니다.

몇 주 후 유엔 내무감찰실(OISO) 산하 조사평가부(IED)는 중국 관영 CCTV가 공개한 사건 영상을 정밀 분석하고 녹음된 음성을 현장 상황과 비교해, 실제로는 불길이 발생하지 않았고 연기 등으로 연출한 ‘조작 사건’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정권은 2001년 1월 23일 톈안먼 광장에서 일어난 자살 사건을 파룬궁을 모함하는 증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우리가 해당 사건 영상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 이 영상은 사건이 정부에 의해 조작됐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 유엔(UN) 내부감찰실(OIOS) 조사평가부(IED) 미국 사무소 공식 논평

그러나 중국에서는 파룬궁의 가르침이 사건의 원흉이라는 비난 방송이 쏟아지면서 파룬궁에 대한 중국 내 여론은 급속히 악화했습니다.

1월 23일 이후 • UN 조사관들은 당국이 공개한 톈안먼 분신자살 영상을 분석해 사건이 조작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외신 기자들은 분신을 시도했다는 사람들의 주변 인물들을 인터뷰한 후 이번 사건이 파룬궁을 비방하려 당국의 조작한 사건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중국 당국은 불에 탄 시신의 컬러 사진을 담은 선전물을 발행해 전국에 배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선전물은 학교와 직장 게시판에도 붙었고 신문과 방송, 라디오에서는 관련 뉴스가 연일 울려 퍼졌습니다.

전국 각급 학교에는 반파룬궁 수업을 실시했고 약 800만 명의 학생들이 포스터, 전단을 배포하는 등 파룬궁 비방 선전 및 교육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또한 1200만 명의 청소년이 파룬궁 비방 글쓰기에 참여했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분신자살’ 사건, 중국 당국에서 발행한 초등학교 ‘사상과 품덕'(도덕) 교과서에는 당국이 조작한 ‘톈안먼 집단 분신자살’ 사건을 이용해 아이들의 동심에 파룬궁을 향한 증오심을 심었다.

있지도 않은 ‘집단 분신자살’에 대한 끊임없는 선전과 언론보도로 파룬궁에 대한 중국 여론은 동정에서 방관 혹은 혐오로 바뀌게 됐다.

파룬궁 수련자에 대한 증오 범죄가 급증했고 장쩌민 정권은 이 기회를 잡아 박해를 강화했다.국제 인권단체 프리덤 하우스에 따르면 이 사건 전후로 파룬궁 수련자의 투옥과 고문, 사망이 급격히 늘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이전 18개월간 박해로 사망한 수련자는 173명이었으나 사건 이후 36개월 동안 869명(18개월당 434명)으로 2.5배가 늘었다.

이는 전체가 아닌 일부 집계로 실제 사망자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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