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방식의 비폭력 저항
한 때 중국에서는 마을마다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을 마주칠 수 있었습니다. 공원에는 수련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이 있었고,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는 파룬궁 서적이 진열됐습니다. 1990년대 말 파룬궁에 대한 억압이 본격화되자,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항의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이 억압은 곧 ‘집단 학살(genocide)’로 변질됐습니다.
중국 사회에서 퍼져나가던 파룬궁은 2000년대가 가까워져서야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999~2000년 톈안먼 광장에 수련자들의 대담한 시위와 경찰의 폭력 진압이 그 계기가 됐습니다. 외신 보도를 통해 파룬궁의 유행과 수난이 알려지게 됐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파룬궁은 언론의 관심에서 사라졌습니다(관련 기고문). 베이징 도심에 다수의 군중이 모여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는 일은 더는 일어나지 않았고, 노란색 현수막과 “파룬따파는 좋다”는 외침 그리고 경찰의 폭력 진압 역시 그 후 5년에 걸쳐 거의 자취를 감췄습니다.
수련자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사건의 결말은 어떻게 됐을까요? 세계에서 가장 큰 공산주의 국가에 맞선 사람들은, 중국공산당이 명령한 대로 ‘말살’되고 만 것일까요? 더는 시위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렇다’고 생각했을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파룬궁은 초반의 활력이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성장하고 성숙하고 진화했습니다. 신념과 끈기로 20년 이상의 박해를 견디며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규모로 중국의 변화를 촉진하고 있습니다. 거리에서 전단을 나눠주거나 포스터를 붙이고 이메일과 메신저, 전화 통화로 일반인들에게 진실을 알리거나 악행에 가담한 경찰에게 선(善)을 권유합니다. 지역 케이블 방송을 통해 비방 선전을 폭로하는 영상을 송출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진실 알리기 활동은 세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자발적 시민 운동으로 추정됩니다. 비폭력과 인터넷, IT기술, 종교적 신념이 결합한 전례 없는 활동입니다.
그 결과, 이전까지 파룬궁과 무관했으나 지지자 혹은 조력자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으며 매일 새로운 기록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후세에 두고두고 전해질 것입니다.
강압을 통한 ‘전향’…. 촉발된 중국의 위기

중국 내 파룬궁에 대한 탄압은 2001년부터 급격히 강화됐습니다. 중국 근대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기로 꼽히는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연상케 하는 공산주의 통치의 어두운 시절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해 8월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파룬궁 탄압이 1999년 7월부터 시작되기는 했지만, 초반에는 “파룬궁을 당의 통치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는 중앙 정부 지도자와 그렇지 않은 지방 관리들 사이의 분열” 때문에 실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폭력도 체계적이지 못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어 정부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탄압이 효과를 내기 시작한 것은 최근 6개월 전부터이며 이는 그해 1월부터 시행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탄압 정책 때문이라고 전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수련자에 대한 제한 없는 폭력 ▲’위험한 사이비 종교’라는 흑색선전 ▲강도 높은 세뇌를 통한 수련 포기 종용이었습니다.
WP는 이 3가지 탄압 수법이 동시에 적용된 사례로 노동교양소(강제노역소)에서 열흘 간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전기기술자 제임스 오우양(영어 이름과 중국어 이름을 조합한 가명. 당시 35세)의 사연을 소개했습니다. 오우양 씨는 수련자였으나 석방 후에는 파룬궁을 비난하고 수련을 거부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오우양은 경찰서에서 발가벗겨진 채 5시간 심문을 받으며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전기 고문을 받았고 이후 베이징 외곽 강제노역소로 이송돼 매일 아침 단 5분의 식사와 용변 시간만이 주어졌습니다. 그는 “시간 내에 끝내지 못하면 바지 안에 해결해야 했다”며 “충격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한 뼘 거리를 두고 벽을 본 채 서 있어야 했는데 움직이거나 지쳐서 쓰러지면 전기 고문을 받았습니다. 6일째 되던 날 시력이 이상이 생겨 잘 볼 수 없게 됐고 이후 3일은 벽을 향해 큰 소리로 파룬궁을 비난해야 했습니다. 그사이에도 거듭된 전기 고문으로 바지에 오줌을 저리는 수치스러운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마침내 열흘째, 간부들은 오우양의 파룬궁 비난이 충분히 진정성이 있다고 판단하고는 아직 전향하지 않은 수련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카메라 앞에서 파룬궁을 반대하는 말을 하도록 했습니다.
아직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뇌 교육반에 보내졌고 하루 16시간씩 파룬궁에 대해 ‘토론’하며 20일을 보낸 후에야 그곳을 ‘졸업’하고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중국공산당이 말하는 ‘전향’의 실체입니다. 고문에 굴복한 그가 파룬궁을 비난하는 발언을 한 영상은 다른 수련자들의 의지를 꺾는 데 이용됐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강압적 환경에서 이뤄진 ‘전향’이 오우양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공산당은 이를 성공이라고 여겼겠지만,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불안정한 성공입니다. 끔찍한 강요에 의한 변화는 실제로는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공산당 정권은 항상 강압적인 태도를 유지합니다. 사람들에게 진심이 아닌 말을 진술하도록 하면서 깜짝 놀라울 정도로 잔인한 수법을 사용합니다.
‘전향’된 사람이라고 해서 정권이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권은 끊임없이 그에게 위협을 가하고 고통을 기억하게 해야 합니다. 또한 전향되지 않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차단하고, 일시적인 고통으로 인해 포기했던 신념이 서서히 회복되는 것도 막아야 합니다.
아울러 신념을 되살릴 서적이나 자료, 영상물 등 정권의 통제를 받지 않는 콘텐츠에도 접촉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공산당 정권이 강력한 권력을 쥐고서도 늘 검열과 감시를 멈추지 않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강압적 조치 중 하나라도 실패하면 ‘전향’은 무위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경제적 측면도 있습니다. 수억 명의 빈곤층 인구에 기본적인 교육이나 의료를 제공할 여력이 없는 정부 입장에서 수천만 명에 달하는 중국 내 파룬궁 수련자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은 막대한 사회경제적 손실입니다.
당시 중국은 노동 쟁의가 급증하고 있었습니다. 공안부 공식 자료에 따르면 1994년 파업·항의·건물점령 등 시위가 1만 건이었으나 2003년에는 5만 8천 건, 2005년 8만 7천 건으로 증가했습니다. 사회에 대한 불만이 급격히 불어나는 상황에서 당국은 파룬궁 탄압에 힘을 쏟은 겁니다.
뉴욕타임스는 1999년 11월 4일 자 기사에서 “최근 몇 주간 교수에서부터 택시 기사까지 많은 중국인들이 비공개적인 자리에서 ‘중국 정부가 과잉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며 “많은 사람들은 건강과 행복을 추구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모인 영적 운동(수련)에 대한 무분별한 탄압이 지속적으로 사회 분열을 일으키고 당에 대한 믿음을 약화할 것이라고 한다”고 전했습니다.
이쯤에서 중국 정부가 전통적인 미덕에 따르는 삶을 살려는 명상가들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말살하려 한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사실 중국공산당 관영매체 신화통신은 당국이 파룬궁 박해를 공식화하고 약 일주일만인 1999년 7월 28일 특별평론에서 그 이유를 직접 밝혔습니다.
신화통신은 “사실, 리훙쯔가 설파한 소위 ‘진(真)·선(善)·인(忍)’은 우리가 주창하는 사회주의 정신문명과는 전혀 다르며 본질에서부터 차이가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진실, 선량, 인내라는 가치가 중국공산당이 추구하는 사회주의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베이징 특파원 출신 중국 전문가 윌리 램(Willy Lam) 제임스타운 재단 수석 연구원은 2001년 장쩌민 정권을 비판하며 “중국은 도덕적 기반을 망칠 뿐만 아니라 경제 및 정치 개혁을 탈선시킬 정직과 신뢰성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중국에서는 2008년 멜라민 분유 파동 이후 각종 유독성 식품 논란이 잇따라 터져 나왔습니다. 유아들이 먹는 분유에도 독성 물질이 들어간 이 사건은 당시 파룬궁 탄압 10여 년째라는 중국 사회의 상황과 무관치 않습니다.
진실, 선량, 인내라는 원칙이 “당의 방침과 맞지 않다”면서 정직하게 살겠다는 사람 수천만 명을 억압하고 본보기로 학대한 사건은 중국에서 살아가던 16억 인구에 ‘도덕적 가치를 추구하면 오히려 해를 당한다’는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善)의 회복력, 전향됐던 수련자들의 귀환

오우양과 같은 억지 ‘전향자’들이 진정으로 혐오한 것은 파룬궁이 아니라 공산당과 국가 체제였습니다. 그는 WP에 “이제 공안과 전기 곤봉을 볼 때마다 메스꺼워서 토하고 싶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억압과 고문으로 쥐어짜 낸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은 혁명적 열정과는 거리가 멀었던 겁니다.
파룬궁 사부 리훙쯔 선생은 “강제로는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당초 사람들이 파룬궁을 수련한 것은 건강과 활력, 삶의 새로운 의미, 주변과의 원만한 관계, 긍정적 마음가짐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파룬궁은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강제로 무릎 꿇렸던 수련자들은 곧 ‘엄중 성명’이라며 고문을 못 이겨 파룬궁을 배신한 일을 밝히고 새롭게 수련을 길을 걷겠다고 선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련자 교류 사이트인 밍후이왕에 한두 편씩 성명이 발표되자 얼마 후 하루에 수백 건씩 비슷한 선언이 잇따랐습니다.
산둥성 노동교화소에 수감됐다는 수련자 퉁스쒼은 2001년 9월 “심각한 박해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 한 말과 작성한 모든 것은 무효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박해에 맞서겠다며 “이번 일을 기회로 현재에도 발생하고 있는 사악한 일들을 폭로하겠다”며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아 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4억 3700만 명 이상의 중국인이 중국공산당과 그 산하 조직인 공산주의청년단, 소년선봉대를 탈퇴하겠다는 성명에 참여했다.
중국공산당과 그 산하 조직 탈퇴를 대신 접수하는 ‘글로벌 공산당 탈퇴 센터’ 공식 웹사이트에 따르면 2024년 10월 20일까지 접수된 탈퇴 성명은 4억3747만 건입니다. 이 수치는 이 글을 작성(번역)하던 시점을 기준으로 하루 5만~6만 건씩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는 중국의 엄청난 변화를 보여줍니다. 하나는 4억 3천만 명 이상의 중국인들이 공산당과 단절을 선언했다는 것이고, 그만한 사람들이 인터넷이나 다른 여러 경로로 해외에 서버와 접수 창구를 둔 탈퇴 센터에 접촉했다는 겁니다. 인터넷을 이용했을 경우 당국의 방대한 네트워크 감시와 차단벽을 통과했다는 의미입니다.
밍후이왕과 파룬따파 정보센터가 입수한 여러 자료에서는 1999년 7월 금지 명령 이후 파룬궁을 그만두게 됐던 수련자들이 다시 귀환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새롭게 수련에 입문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나오고 있습니다. 동북부 산둥성의 수련자 장쉐링(32)은 파룬궁 수련자였던 어머니의 죽음에 얽힌 의문을 추적하다가 경찰에 체포돼 수감됐으나 감옥에서 만난 파룬궁 수련자들의 인품에 감복해 출옥 후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보이는 것만 믿는 유물론자였다고 소개한 장쉐링은 “파룬따파는 진, 선, 인을 원칙으로 한다. 이를 지켜낼 수 있다면, 삶은 더 깊은 의미를 갖게 되지 않겠냐”고 한 언론에 말했습니다.
20년에 걸친 탄압 속에서도 전향을 거부하고 끝까지 신념을 지켜낸 수련자들 역시 많으며 직접 탄압을 받진 않았지만, 엄혹힌 환경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은 이들도 많습니다. 물론 고문을 당해 끝내 숨을 거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최소 3천 명 이상의 사망이 확인됐고 매년 연도별 사망 사례가 추가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밍후이왕에 따르면 지난해 208의 사망이 추가했는데 이 가운데 88명은 2002~2022년 사망했습니다.
혹독한 시련 속에서 꽃피운 확신과 용기

국제사회가 몰랐던 것은 수련자들이 단지 숫자만 많은 군중이 아니라 신념의 힘을 지닌 집단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1900년대 인도의 비폭력 저항 운동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는 “사명에 대해 꺼지지 않는 믿음으로 불타는 소수의 결단력 있는 영혼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파룬궁 수련자들은 결단력도 있었고 적은 숫자도 아니었습니다.
신념의 힘은 우선 즉각적 반응으로 나타났습니다. 1999년 7월, 탄압이 본격화하자 수련자들은 이것이 부당한 처사라고 인식했습니다. 파룬궁 금지령과 뒤이은 당국의 폭력과 고문, 살인은 자국법과 중국이 가입한 여러 국제 조약 위반이었습니다. 중국은 공산주의 체제이지만 명목상으로는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입법부가 파룬궁 탄압의 근거가 되는 법 조항을 제정한 것은 같은 해 10월이었습니다. 탄압 개시 석 달 만에 뒤늦게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이를 소급 적용한 겁니다. 공원에서의 수련, 1999년 4월 톈진시 당국의 폭행에 맞서 1만여 명이 베이징 정부 청사 인근에 모인 일 모두 위법 행위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수련자들을 베이징에 가라고 한 것은 톈진시 당국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탄압에 대한 초기 반응 이후, 신념의 힘은 좀더 깊은 곳에서 작용했습니다. 수련자들은 이번 탄압이 야외 군중 활동에 대한 금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 가치의 재발견과 정체성 회복에 대한 억압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마주한 위협은 집회할 권리의 침해가 아니라 인격과 자아의 상실이었습니다.
수련자 자오밍은 중국 공산당의 탄압이 실은 사람의 영혼에 대한 박해라는 점을 알게 됐다고 했습니다. 베이징 외곽의 한 노동교화소에서 2년간 수감됐던 그는 “고문의 목적은 사람들을 양심이 없는 기계로 개조하고 타인을 해치는 도구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수련자들은 파룬궁을 통해 삶의 활력을 회복했고 고민하던 철학적 문제의 해답을 얻었습니다. 건강하고 진실하며 선량한 사람이 되라는 파룬궁의 가르침이 문제라는 당국의 세뇌 공작은 사실 다수 수련자에게는 잘 통하지 않았습니다.
불가에서는 모든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불가 수련에 속하는 파룬궁의 수련자들도 고통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신념으로 어떻게 지켜나갈지에 집중했습니다.
공산당은 파룬궁을 일종의 정치적 사건으로 취급했지만, 수련자들이 느끼는 박해는 자신과 이웃, 인간을 향한 폭력이었습니다. 파룬궁 수련은 자신을 비우고 타인을 위하는 길입니다. 공산당이 마주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자비심을 닦고 있던 거대한 수련자 집단이었습니다.
이러한 자비심의 대상은 자기편 혹은 같은 수련자 집단 내에만 머물지 않았고 모든 사람 심지어 자신을 적대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했습니다. 수련자들은 공산당의 허위·증오 선전에 속아 파룬궁을 적대시하게 된 사람들 역시 희생자로 여겨 연민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기라는 파룬궁의 가르침에 따라, 수련자들은 심지어 파룬궁을 모욕하고 박해에 가담한 사람이라도 극악한 일부를 제외하면 구해야 할 대상이라고 여깁니다.
미국의 비폭력 저항 운동의 상징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불의 앞에 폭력이 아닌 사랑으로 맞설 것을 주장했습니다. 어떤 이는 중국에서 벌어진 이 사건을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악과 가장 순수한 선의 대결이라고 말합니다.
거리에서 온라인으로 옮겨간 비폭력 운동

자신의 신념에 따라 용기를 낸 수련자들은 힘없는 노인 혹은 활달한 청년 때로는 직장인이나 가정주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출발점은 사회를 어떻게 바꾸겠다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박해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소박한 마음이었습니다. 수련자들은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진실을 이해하면 다르게 대처하리라 기대했습니다. 파룬궁은 정치적 야망이 없다는 점도 분명히 하려 했습니다.
많은 수련자가 중국에서 ‘신팡(信訪·신방)’으로 부르는 청원을 하기 위해 수도 베이징 혹은 지방 중심도시로 향했습니다. 중국에서도 억울한 일이 있는 사람은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청원 접수처에 청원하도록 관련 제도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2007년 관영 신화통신 보도에 따르면, 국가신방국 공식 집계 결과 2003년부터 5년간 중국 전역에서 접수된 청원은 서한 발송과 직접 방문을 포함해 연평균 1천만 건에 달했습니다. 기사에서는 베이징 중앙정부 청원 접수처는 늘 수십 명의 대기자로 붐빈다고 전했습니다.
따라서 1999년 4월 베이징의 중앙정부 청사 앞에 수련자 1만 명이 모인 것도, 그해 7월 파룬궁 금지령이 공식화됐을 때 수련자들이 베이징으로 향한 것도 모두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특히 4월에는 주룽지 당시 총리가 직접 수련자 대표 3명을 만나 요구사항을 모두 수용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국가에서 보장한, 청원할 권리를 행사하려던 많은 수련자에게 한 가지 당황스러운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청원 접수처를 방문한 수련자는 모두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는 겁니다. 장쩌민이 내린 이 명령에 따르면 접수처에 도착한 서한은 소각 대상이었습니다. 즉 공산당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의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곧 공공연한 폭력이 목격되기 시작했고 그 빈도와 강도도 높아졌습니다. 수련자들은 광장이나 길거리, 공원에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폭행을 당했습니다. 관영매체는 ‘그것은 당의 방침’이라는 명료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박해가 시작되고 한 달 사이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에 실린 파룬궁 비방 기사는 무려 347편에 달했습니다. 하루 10편씩 폭격하듯 쏟아낸 겁니다. 관영 CCTV에서는 파룬궁을 비방하는 방송이 쉴 새 없이 이어졌습니다. 당국은 일주일 만에 파룬궁 관련 서적 200만 권을 압수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공안부 주도로 파룬궁 관련 자료 소각 행사를 열었습니다.
수련자들이 청원 접수처 대신 거리로 나서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진실을 알릴 대상은 정부 고위층뿐만 아니라 물론 갑작스러운 선전 방송에 혼란스러운 일반 대중으로 넓어졌습니다. 수련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 했습니다.
행인과 관광객, 외국인들까지 마주칠 수 있고 역사적 상징성까지 지닌 톈안먼 광장이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곳에서는 정장을 입은 직장인이나 작업복 차림의 농부, 평상복을 입은 남녀나 어린아이들까지 현수막을 펼치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현수막에는 ‘파룬궁은 좋다’, ‘파룬따파의 명예를 회복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당국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수련자들을 체포해 주먹질과 구둣발로 폭행하고 심문한 후 일반적으로 2~3년씩 징역형이나 노동교화형(강제노역형)에 처했습니다. 그럼에도 톈안먼으로 향하는 수련자들의 행렬은 2년 가까이 지속했습니다.
2002년에 접어들면서 수련자들의 활동은 새로운 양상을 보였습니다. 서양인 파룬궁 수련자 50명이 현수막을 펼친 일이 있었지만, 강도 높은 감시와 체포로 인해 톈안먼 광장을 찾는 발길은 거의 끊겼습니다. 대신 진실을 알리는 활동은 전국 곳곳으로 더 활발히 확대됐습니다.
같은 해 3월 중국 동북부 지린성의 8개 케이블 유선방송망을 가로채 정규 프로그램 대신 파룬궁의 진실을 알리는 영상을 45분 가까이 송출했습니다. 이 영상은 2001년 초 터졌던 톈안먼 집단 분신자살 사건이 실은 당국의 교묘한 조작극이라는 점을 폭로해, 1999년 7월 이후 2년 넘도록 파룬궁에 관해서는 관영매체 보도만 접했던 주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이 영상은 최소 수십만 명이 시청했을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파룬궁 관련 자료를 읽어보기만 해도 체포하며 진실이 퍼지는 것을 막아온 중국공산당 지도부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이 사건에 놀란 당 지도부는 창춘에 사실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규모 체포 작전을 펼쳤고 결국 연루된 수련자들은 거의 모두 고문과 가혹행위로 사망했습니다.
진실을 알리려는 수련자들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해 쓰촨성, 랴오닝성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이어졌습니다. 당국은 탄압의 수위를 높여갔지만, 진실을 알리는 활동 역시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중국인들은 파룬궁에 관해 알고 싶어도 관영매체의 일방적 편파 보도 외에 다른 소식은 알 수 없었습니다. 수련자들은 인쇄물을 찍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집에서 개인이나 몇몇 수련자가 모여 컴퓨터와 프린터, 혹은 등사기로 전단과 소책자를 제작했고 당시 흔히 사용되던 영상 매체인 비디오시디(VCD)도 만들었습니다.
관영매체의 보도와는 다른 진실을 담은 이 자료들은 헌신적인 수련자들의 손을 통해 중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수련자들은 때로는 야심한 밤이나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집마다 다니며 우편함이나 자동차 앞 유리 와이퍼 밑에 전단을 꽂아두거나 주택 현관문 아래 틈을 통해 VCD를 밀어 넣었습니다. 담장이나 전봇대에 포스터를 붙이기도 했습니다.
2002년 11월 중국을 탈출, 아랍에미리트에서 캐나다 정부의 도움을 받아 캐나다에 난민으로 입국한 파룬궁 수련자 왕위즈 위즈는 회고록에서 중국에 있었을 때 자비를 들여 수십만 장의 전단을 인쇄했고 헤이룽장의 수련자들이 이를 배포했다고 밝혔습니다.
수련자들이 ‘자료점’이라고 부르는 이런 풀뿌리 활동은 점조직 형태로 중국 여러 도시에서 가동되고 있으며, 수련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도 진실을 알게 된 후 자발적으로 돕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자료에는 파룬궁이 오해를 받고 있다는 내용만 담긴 것은 아닙니다. 수련자들을 고문하거나 살해하고 가정을 파탄 낸 공안 관계자나 당 간부들을 악행을 폭로하는 벽보도 있습니다. 이런 활동은 먼저 수련자들의 제보를 받은 후 동료 수련자들의 사실 확인 작업을 거쳐 이뤄집니다.
감옥이나 수감시설에서 수련자를 고문하고 살해한 악랄한 박해자는 어느 날 출근을 하다가 자신이 몰래 저지른 추악한 행위를 상세히 폭로한 벽보를 목격할 수도 있습니다. 지역 주민들이나 친척, 지인들이 해당 내용을 담은 전단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악행을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만으로도 일정 부분 저지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런 악행 폭로 활동은 해외와 연계해 그 파급력이 확대되기도 합니다. 중국에서 이런 정보를 외부로 보내는 것은 쉽지 않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것만도 아닙니다. 수련자들이 해외에 서버를 두고 구축한 웹사이트인 파왕휘휘(fawanghuihui.org)는 2024년 10월 기준으로 6만 명의 ‘악인’들의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돼 있습니다.
데이터베이스에는 일련번호에 따라 악인의 실명과 지역, 소속과 직위, 연락처, 박해 내역 등이 기록됐으며 지금도 계속 업데이트 중입니다. 목적은 박해 사실을 공식적으로 기록해 추적할 수 있게 하고, 동시에 전 세계 파룬궁 수련자들이 명단에 오른 악인에게 전화를 걸거나 혹은 다른 방식으로 연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활동은 사적 제재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수련자들의 법적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 청원 창구를 통한 구제 시도를 차단했으며 관영매체와 다른 소식과 정보를 알릴 수단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수련자들은 자구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박해자에게 전화를 건다고 해서 수련자들이 거친 언사로 항의하거나 위협을 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을 알리고 박해를 저지하는 활동의 대원칙은 파룬궁의 진선인(真善忍)에 걸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련자들은 악인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내면에는 선(善)으로 돌아갈 희망이 있을 수 있으므로 연민의 손길을 내밀려 합니다. 남을 해치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해치게 된다는 도리를 알려 그의 선한 면을 일깨우는 것이 전화를 거는 활동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모두가 이런 손길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만 일부 정부 관리나 당 간부들은 간곡한 이야기를 듣고 “다시는 박해에 가담하지 않겠다”, “내가 잘못했다”라고 마음을 되돌리기도 합니다.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중국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수련하고 있으나, 공식적으로는 파룬궁을 위한 물리적 혹은 사회적 공간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수련자들의 다양한 활동은 인터넷 공간에서 공유됩니다. 가장 핵심적인 공간은 수련자들의 교류 사이트인 밍후이왕(Minghui.org)입니다.
1999년 6월 개설한 이 사이트는 중국과 전 세계 파룬궁 수련자들을 연결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자료와 정보, 기술을 공유하는 플랫폼으로 기능합니다. 예를 들어 나무나 전신주 등 높은 곳에 현수막을 던져서 안전하게 설치할 수 있는 발명품의 제작법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편씩 올라오는 수련 체험담과 일상에서의 발견, 세계 곳곳에서 펼쳐지는 수련자들의 활동을 알리는 게시물은 새로운 인식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보물창고입니다. 지구 반대편 수련자들과 아이디어를 나누고, 중국 본토에서 억압을 겪으면서도 자신을 닦고 성장해 가는 이들의 강인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교류 마당입니다.
때로는 참혹한 박해와 피해 사실을 알리고 기록하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기도 하며, 고문과 세뇌로 좌절했던 사람들이 ‘엄중 성명’을 통해 새롭게 일어서고 다시 시작하는 성숙의 장이기도 합니다.
참혹한 박해를 피해 온라인 공간에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밍후이왕을 비롯해 파룬궁 수련자들이 모이는 웹사이트는 중국 정권에 의해 금지됐으며, 중국 본토에서 당국의 인터넷 차단벽을 우회해 해당 웹사이트에 접속하는 것만으로도 체포될 수 있습니다.
국제적 공조가 빛을 발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해외의 과학자, 공학자 수련자들은 박해 초기부터 정권의 검열과 인터넷 차단을 피할 수 있는 정보통신(IT) 기술 개발에 힘을 쓰고 이를 중국 현지에 배포하는 방법도 연구해 놀라운 성과를 이뤘습니다.
수련자들이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중국에서 차단된 외국 뉴스 사이트와 검색 엔진 등에 접속한 중국 네티즌의 조회수는 지난 2005년에만 하루 평균 3천만 건에 달했습니다. 이는 중국을 대상으로 활동하는 어떠한 단체로 달성하지 못한 수치입니다.
이 모든 성과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자원을 투입한 수련자들이 일궈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간디의 말처럼 “사명에 대해 꺼지지 않는 믿음으로 불타는”, “결단력 있는 영혼이 역사의 흐름을 바꾼”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경을 뛰어넘은 수련자들의 협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중국의 수련자들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진실을 알리는 전단과 소책자, 영상물을 배포하는 사이 해외 수련자들은 중국의 박해자를 향해 전화와 팩스, 메시지로 악행을 멈출 것을 권유했습니다.
정확한 집계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이러한 전화 통화는 연평균 3천만~4천만에 달했고 매월 약 30만 건 이상의 팩스가 중국 곳곳의 공안 사무실로 날아들었습니다. 현재 이러한 노력에는 중국 본토를 향한 라디오 방송 송출, 위성 방송도 포함됩니다.
이 모든 활동은 재정적 보상이나 대가를 구하지 않고 자신의 생활을 이어가면서 남는 시간을 쪼개어 가며 자원적으로 했기 때문에 20년간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신념의 힘입니다.
얽매였던 사람들, 공산당을 탈퇴하다

20년 이상 지속된 파룬궁 박해 과정을 통해, 외부와 고립된 거대한 중국이라는 감옥 안에서 벌어지던 공산당의 잔인한 종교 및 인권 탄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중국인과 국제사회가 알게 됐습니다.
초기에는 중국공산당 내에서도 장쩌민(총서기), 뤄간(공안조직 총괄), 쩡칭훙(국가 부주석) 등 박해를 주도한 세력과 주룽지(총리) 등 거부한 사람들도 나뉘었으나, 시간이 길어지면서 조직 전체가 파룬궁에 대해 매우 강경해졌습니다.
강압과 숙청으로 당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점차 제거됐고 박해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이들은 승진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통치 시스템에서 배제됐습니다. 조직 전반에 걸쳐 파룬궁 박해에 가담하는 이들에게 후한 인센티브가 주어졌습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파룬궁 대변인 장얼핑은 몇몇 권력자의 일탈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장 대변인은 “시스템 전체가 심각하게 부패했다”며 “예를 들어 법원만 개선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관료조직, 사법 체계, 언론계 심지어 교육계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당에 복종하고 있다. 파룬궁 탄압은 놀랍도록 조직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중국에서 박해를 경험하고 미국으로 탈출한 수련자 자오밍은 “파룬궁에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다”라며 “중국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이후 중국의 모든 정신적 전통을 말살하려 했다. 문화대혁명 때는 불교, 도교, 유교 모두 탄압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국에 본사를 둔 매체 에포크타임스의 중국어 버전인 따지웬(大紀元)에서 발간한 책 ‘중국공산당에 대한 9가지 논평'(이하 9평 공사당)은 중국공산당이 창당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벌인 참혹하고 어리석은 사건들을 중국인의 시선에서 조망합니다 .
앞서 서양인이 연구한 공산당에 관한 서적들은 많았지만 2004년 11월부터 순차적으로 공개된 ‘9평 공산당’은 중국에서 수십 년간 직접 공산당의 폐해를 경험한 입장에서 방대한 문헌과 체험을 결합했고, 특히 중국인 독자에게 불가사의한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중국인들은 평생 특권층으로 살 수 있는 공산당 당원 신분을 내던지기 시작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평영(200m) 은메달을 수상한 황샤오밍을 비롯해 유명 인사들의 공산당 탈퇴 선언이 잇따랐습니다.
관영 신화통신은 공산당 탈퇴 물결은 사실이 아니라고 보도했지만, 사람들은 관영매체가 이 사건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난 충격을 시인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관영매체 주장대로 사실이 아니라면 언급할 이유조차 없을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곧이어 중국 각지에서는 공산당 주도로 진행된 정치사상 학습, 기강 확립 등 움직임 역시 충격에 대한 방증으로 이해됩니다.
사건 초기 하루 수백 명 수준이었던 공산당 탈퇴자 수는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하면서 2005년 1백만 명을 돌파하고 이듬해 1천만 명, 2009년 5천만 명, 2011년 1억 명을 넘어섰습니다. 현재는 2024년 10월 말 기준으로 4억 3,700만 명을 기록 중입니다.
공산당 탈퇴는 중국공산당을 비롯해 산하 청년 조직인 공산주의 청년단, 유소년 조직인 소년선봉대를 포함하며 에포크타임스가 후원하는 글로벌 공산당 탈퇴 센터에서 접수·집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열렬한 반응에 대해 에포크타임스 전 편집장 스티븐 그레고리는 “55년간의 거짓말과 공포 끝에 중국인들은 자신의 진정한 역사를 알 기회를 얻었다. 그들은 중국공산당 치하에서 겪은 엄청난 손실을 최근에야 발견하고 공유했다. 공산주의의 악몽에서 깨어나 공산당이 애써 파괴해 온 고대 문명의 아름다움과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고 썼습니다.
공산당을 탈퇴하는 것은 서면으로 혹은 인터넷으로 공산당에서 빠져나오겠다고 선언하는 간단한 행위이지만, 중국인들에게는 수십 년간 두뇌와 영혼을 옭아매던 구속을 벗고 자유를 되찾는 치유의 기회입니다. 공산당의 변덕과 편집증을 벗어나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고 역사와 문화를 되찾는 활동입니다. 오늘날 공산당하면 중국이 떠오르지만, 공산주의 이념 자체는 서구에서 들어온, 중국으로서는 외래의 망령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이러한 공산당 탈퇴를 정치적 행위라고 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중국에서는 모든 단체에 공산주의 조직망이 뻗어 있고 모든 사회제도에 공산주의 이념이 스며들어 있기에 모든 것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다시 말해 정치의 가장 사악한 사례인 겁니다.
중국공산당은 공자를 반혁명적이라고 낙인찍었다가 최근에 부활해 숭배하는가 하면, 어린 10대 청소년을 홍위병으로 타락시켜 각종 문화유산을 파괴하도록 하고서는 이제 와서 문화 부흥을 외치고 있습니다. 문화와 전통마저 정치적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공산당이라는 정치 집단에서 벗어나겠다는 선언이지만, 그것은 모든 것을 정치로 여기는 공산당의 속박, 자아 학대, 인간성의 말살로부터의 탈출이자 자기 회복입니다. 탈퇴 이후 어떤 정치 집단에 가입하는 게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이 되는 것이기에 실제로는 탈(脫)정치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비폭력 저항의 궁극적 형태이며,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변화입니다.
‘9평 공산당’의 출현과 비폭력 저항의 확산

입막음 당한 사람들이 거리에서 조용히 현수막을 치켜드는 일로 시작된 비폭력 저항은 중국공산당을 빠져나가겠다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성장했습니다. 그 사이 중국 바깥에서도 느리지만 거대한 변화가 촉동했습니다.
로이터 통신은 2000년 10월 1일 자 기사에서 “수백 명의 (파룬궁) 수련자들이 일요일에 열린 중국의 국경절 기념행사에서 사람들로 북적이는 톈안먼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고 목격자를 인용해 보도했습니다.
통신은 “경찰은 수백 명의 파룬궁 수련자를 붙잡아 버스에 태우면서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렸으며 머리채를 낚아챘다”면서 “그들은 평화롭게 (비폭력 저항을) 해냈다. 그들은 맞으면서도 반격하지 않았다”는 중국계 망명 시인 황베이링의 말을 전했습니다.
중국 시인 황베이링은 “이 나라의 지식인들에게 광범위한 시민 불복종을 통해 정부의 억압에 맞서 싸우는 파룬궁 명상가들의 사례를 따르라고 촉구했습니다.” 기사는 황이 “그들은 평화롭게 이 일을 해왔습니다. 그들이 맞을 때, 그들은 반격하지 않습니다. 지식인 커뮤니티도 똑같이 해야 합니다.”라고 말한 것을 인용했습니다.
2005년 미국의 한 병원에서 숨지기 전까지 반세기 가까이 ‘중국의 양심’으로 불렸던 유명 반체제 작가 겸 언론인 류빈옌은 파룬궁 수련자들을 “전례 없는 용기”로 묘사하며 “이들은 체포되고 일부는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권리를 지키려 했다”며 “중화인민공화국 50년 동안 전례 없었던 일”이라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미국에 망명 중인 중국 반체제 작가 후핑은 중국 동북부 창춘에서 지역의 관영 케이블 방송을 통해 파룬궁에 대한 박해가 부당하다는 영상을 송출했다가 당국에 붙잡혀 고문 끝에 사망한 수련자 류청쥔을 “언론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순교자”라고 불렀습니다.
류빈옌과 후핑은 모두 수련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파룬궁에 대해 잘 몰랐거나 무관심했던 중국의 지식인들이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해외에서 조금씩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과정에서 ‘9평 공산당’이 큰 역할을 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중국의 유명 인권변호사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가오즈성은 공산당 탈퇴 선언문에서 “비폭력적 변화에 관해서라면, 파룬궁이 성공했다고 말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그것은 사람들에게 사악한 당을 탈퇴하도록 설득하는 것”이라며 “공산당은 세상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악을 저질렀다. 나는 공산당을 탈퇴하고 신에게 더 가까워질 것을 제안한다. 오늘은 내 생애 가장 자랑스러운 날이다”라고 했습니다.
2005년 5월에는 호주 시드니 주재 중국 총영사관의 정무담당 영사였던 천융린이 공산당 탈퇴를 선언하고 호주로 망명했습니다. 천융린은 시드니 현지의 파룬궁 수련자들을 감시하는 업무를 맡았었다면서 “중국에는 정치적 자유, 인권의 자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밖에도 캐나다 등지에서도 파룬궁 감시 혹은 박해 임무를 맡았던 중국 전·현직 관리들이 공산당을 탈퇴하고 현지에 망명했습니다. 천융린 전 영사를 비롯해 이들은 모두 “‘9평 공산당’을 읽고 탈퇴를 결심하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 미국 하버드 대학,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검열 모니터링 프로젝트인 오픈넷 이니셔티브의 2005년 연구에 따르면 ‘9평 공산당’과 연결된 중국어 웹사이트의 90%가 중국에서 차단됐습니다. 이 연구에서 발견한 가장 심각한 수준의 검열이었습니다.
강도 높은 검열 이면에는 중국공산당의 어두운 역사를 밝혀낸 ‘9평공산당’이 가져올 파급력에 대한 당국의 두려움이 숨어 있다는 게 천융린 영사의 설명입니다.
그는 중국 고위층 상당수가 공산당의 미래를 불안하게 보고 있다면서 파룬궁 박해를 주도한 장쩌민과 측근 쩡칭훙도 호주 이민 비자를 확보해 두려고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중국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중국 정보기관들은 파룬궁 박해와 관련된 정부 문서와 자료들을 폐기하고 있습니다. 나중에라도 역사의 흐름이 바뀌어, 박해의 부당함이 만천하에 알려지고 박해 주도자와 가담자들이 심판대 앞에 설 일이 두렵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중국공산당은 1999년 7월 파룬궁 탄압을 지시하면서 3개월 안에 중국에서 완전히 없애겠다고 자신했지만, 25년이 흐른 지금까지 국력을 다한 잔혹한 박해에도 파룬궁을 몰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중국 반체제 작가 후핑은 “조금만 상황을 아는 사람이라면 탄압은 실패로 끝날 것을 알 수 있다”며 “활력이 넘치고 미래가 밝은 파룬궁은 중국에서 도덕적 가치의 부활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이 글은 파룬따파 정보센터 대표 레비 브로드(Levi Browde)의 기고문을 2024년 실정에 맞게 정리한 글입니다. 브로드는 미국 뉴욕에서 아내, 두 자녀와 살고 있습니다.

